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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속 악역은 정말 나쁜 사람일까? – 인간의 이면과 도덕의 모호성

by liverpudlian 2025. 5. 23.

오페라에는 유난히 강렬한 악역들이 등장합니다. 독재자, 살인자, 배신자, 유혹자 등. 그들은 주인공을 고통 속에 밀어넣고, 종종 죽음에 이르게도 만듭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단순한 ‘악한 존재’일까요? 오페라는 선악 구도를 단순하게 나누는 장르가 아닙니다. 욕망, 질투, 절망, 자기보호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는 서사 속에서 악역은 종종 가장 인간적인 인물로 나타납니다. 이 글에서는 오페라 속 악역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다시 바라볼 수 있는지를 생각해고자 합니다.

오페라 속 대표 악역들 – 스카르피아, 도랭, 돈 조반니

푸치니의 『토스카』에 등장하는 스카르피아는 권력과 욕망의 상징입니다. 그는 토스카를 협박하고, 연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권력형 악인입니다. 하지만 그의 대사와 음악에는 단순한 사디즘이 아닌, 병적인 집착과 권력에 대한 불안감이 묻어납니다. 베르디의 『카르멘』에 등장하는 도랭은 처음에는 순수한 군인이지만, 사랑에 대한 통제욕이 커지면서 결국 카르멘을 살해합니다. 그는 사랑을 욕망으로 오해했고, 자신의 상처를 폭력으로 대체한 인물입니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는 전형적인 유혹자지만,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그 안에는 인간 존재의 공허함과 도망치는 자아가 숨어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악’이라기보다는, 자신을 감정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무너진 인간’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 감정 구조와 인간 심리

오페라는 사건보다 감정의 흐름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하는 장르입니다. 따라서 악역의 행동도 극적 갈등보다는 감정의 축적으로 설명됩니다. 스카르피아는 아리아보다 레치타티보(Recitativo, 말하듯 감정을 전달하는 낭송적 노래)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그는 토스카에 대한 욕망을 ‘정복해야만 안심할 수 있는 권력의 수단’으로 인식합니다. 도랭은 『카르멘』 후반에서 아리아보다 훨씬 많은 내부 독백과 반복되는 음악적 패턴을 통해 ‘상실의 공포’를 말 없이 표현합니다. 돈 조반니는 아리아와 앙상블 속에서 감정을 피하고 조롱으로 덮습니다. 이는 감정의 억압이 곧 파괴적 충동으로 전환되는 심리적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오페라의 악역들은 명백한 ‘악’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왜곡하고 회피하거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인물들입니다.

오페라가 그리는 악의 진짜 정체 – 도덕보다 감정이 먼저인 예술

오페라는 본질적으로 ‘감정의 예술’입니다. 리브레토(대본)와 음악은 행동의 도덕성보다 감정의 동기를 먼저 드러냅니다. 그래서 오페라 속 악역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을 읽는 대상입니다. 『리골레토』의 리골레토는 희극 배우이자 복수심에 휩싸인 아버지로 등장하지만, 그의 분노는 딸에 대한 사랑의 뒤틀린 표현입니다. 『일 트로바토레』의 아즈체나 역시 어머니로서 복수를 택하는 인물이지만, 그녀의 아리아는 고통과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페라의 악역은 단선적인 악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복잡한 감정의 농도를 대표합니다. 이를 통해 오페라는 도덕적 심판보다 감정의 층위를 탐색하는 장르가 됩니다.

현대적 시선으로 본 악역의 재해석 – 악역 없는 오페라가 가능한가?

현대 무대에서는 악역조차도 공감과 해석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연출가들은 악역을 더 이상 ‘파괴자’로만 연출하지 않고, 구조적 모순의 희생자 또는 감정적 생존자처럼 표현합니다. 『카르멘』에서 도랭은 질투에 찌든 연인에서 ‘감정의 경계선을 넘지 못한 남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토스카』의 스카르피아는 독재자의 상징이라기보다 '내면이 비어 있는 권력 중독자'로 조명됩니다. 일부 현대 오페라는 아예 ‘전통적 악역’이 없는 구조로 새롭게 쓰이기도 합니다. 갈등이 아니라 감정의 충돌, 선악이 아니라 선택의 차이로 극을 이끄는 것입니다. 오페라가 감정 예술이라는 본질을 유지한다면, 악역 없는 오페라도 충분히 가능하며, 이미 그런 방향으로 무대는 바뀌고 있습니다.

오페라의 악역은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감정의 어두운 거울이다

오페라 속 악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악한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하거나, 고통을 회피하다 타인을 해치는 인물입니다. 오페라는 그들을 심판하지 않고, 대신 보여줍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가진 모순, 불안, 외로움, 통제 불가능한 감정들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역을 미워하는 동시에 연민하게 됩니다. 결국 오페라는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감정의 갈등이 펼쳐지는 무대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의 어두운 거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비춰보게 되는 것입니다.